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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챙겨야 할 것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에는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우리가 흔히 '사람구실'이라 부르는 것들, 이를테면 경조사에 얼굴을 비추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친구에게 밥 한 끼를 사는 일이 그렇다. 사람 노릇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으려면 대개 무언가가 오가야 한다. 그 무언가의 상당 부분이 결국 돈이다.
마음만으로는 닿지 않는 자리
친구의 청첩장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드는 건 축하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곧이어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식사 비용은 얼마일지, 축의금은 얼마가 적당할지, 거기까지 가는 교통비와 입고 갈 옷은 어떻게 할지. 부모님 생신, 조카의 돌잔치, 동료의 부고까지 사람 사이의 도리는 대부분 봉투에 담겨 전해진다.
마음이 중요하다고들 말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봉투는 눈에 보인다. 아무리 진심이어도 빈손으로 가는 자리는 어딘가 위축되고, 그 위축감이 쌓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발길을 줄이게 된다.
문제는 이 망설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형편이 어려운 달에는 모임에 빠지고, 빠지다 보면 다음 모임은 더 가기 어려워진다. 연락을 못 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민망해서 안부를 미루고, 미루다 보면 어느새 '연락이 뜸한 사람'이 되어 있다. 누가 밀어낸 것도 아닌데 관계의 바깥으로 조금씩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 자리들이 쌓여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가난이 통장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관계의 문제로 번지는 순간이 바로 여기다.
돈이 만드는 최소한의 품위
돈은 남에 대한 도리를 다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품위도 만들어 준다. 몸이 아픈 날 망설이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것,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부탁을 정중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여유에서 나온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고, 여유가 없는 사람은 '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많다. 선택지가 줄어들면 자존심도 함께 줄어든다.
또 하나 짚어 둘 것은, 여유가 마음의 너그러움과도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루하루가 빠듯한 사람은 남의 사정을 헤아리고 싶어도 힘이 달린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일에 마음을 쓰라고 하는 건 가혹한 요구다.
반대로 어느 정도 안정된 사람은 작은 일에 덜 날카로워지고, 상대의 부족함도 더 넉넉하게 받아 준다. 흔히 "돈 이야기를 하면 속물 같다"고 하지만, 돈이 없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품위와 여유라는 점을 생각하면 돈을 인간다운 삶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쪽이 오히려 더 정직하다.
그럼에도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사람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액의 축의금을 내고도 진심으로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빈손으로 와서 밤새 곁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대개 얼마를 냈는지가 아니라 어떤 얼굴로 곁에 있어 주었는지로 남는다. 돈은 도리를 수월하게 해 주는 도구일 뿐, 도리 그 자체가 아니다. 도구가 없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형편이 어려운 때일수록 돈이 들지 않는 방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전화 한 통, 안부 문자 한 줄, 직접 만든 반찬 한 통, 이사하는 날 거드는 두 손, 힘든 일을 들어 주는 두 귀가 그렇다. 이런 것들은 가격표가 없지만 때로는 봉투보다 오래 남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진 만큼 성실하게 하려는 태도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못 하는 부분은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결국 사람구실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말이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돈을 벌고 모으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되,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 진짜 사람구실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